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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2 미래에 나에대한 진실

야금맘 2023. 9. 24. 08:56

Part2의 프롤로그 격인 이 내용은 part1의 프롤로그 격인 프랭클의 강제수용소 이야기만큼 영화 한편을 본듯한 강한 인상을 준다. 두 부분은 나를 전율케하고 엄청난 눈물을 쏟게했다.. 무엇이 어떤것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두사람의 의지? 믿음? 드라마틱한 인생굴곡? ..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한 마음과 사람의 성장이었을듯 싶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forainonah1oroh,타고난 거지말쟁이 있다.
1005년 12월 30일, 그는 자신이 필리면 역사상 최고의 한강을 밥은 전쟁 영웅 입을 주장하면서, 필리핀의 제10대 대통령이 됐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필리핀 전역에 기반 시설을 구축하는 정책을 공격적으로 단행했다. 외국 자본을 빌려 새로운 도로를 건설하고 학교와 복합 시설을 지었다. 대통령 첫 임기 동안, 그는 파격적인 재정지출을 감행하며 인기를 얻었다.
마르코스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 동안 이 재정지출이 쌓여 국가부 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인플레이션 위기가 닥쳤다. 필리핀의 경기 는급격하게 침체했고, 사회의 안정을 위협하는 불안 요소가 곳곳에 서 터져나왔다.
마르코스는 국민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통령 재임 시절, 그와 그의 가족은 필리핀 중앙은행에서 도둑질한 돈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다. 마르코스 가족은 50억에서 100억 달러로 추정되 는 역대 최대 규모의 정부 절도로, 기네스북 세계기록에도 등재됐 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자신의 군대에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했는데, 이는 외국 침략 세력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철권통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을 통제하고 처벌하기 위해서 였다.
마르코스가 집권하는 동안 필리편은 빗의 수렁으로 깊이 빠졌 다. 사회적, 도덕적으로 부패가 만연하면서 나라에 내부 분열이 생키고 갈등이 폭발했다.
많은 사람이 정권 교체를 원했다. 그 가운데는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 2세 Benigno Ninay Aquno 나라는 젊은 신진 정치인이 있었다.
정치인 집안에서 태어난 니노이는 1954년, 22세에 불과한 나이에 시 장에 당선됐다. 5년 후인 27세에는 필리핀 정부의 최연소 부지사가 됐다.
니노이는 1954년에 코리Cory라 불리는 코라손 스물롱 코후앙코
Corazon Sumulong Cojuangco와 결혼했다. 코리는 부유한 필리핀 가톨 릭 집안 출신의 엘리트 여성이었다. 니노이가 정치 경력을 쌓아가 는 동안, 코리는 자녀 다섯을 양육하는 데 전념하며 남편의 정치 활 동을 도왔다. 코리는 남편이 무언가 결정을 내릴 때 매우 지혜로운 조언을 해주는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니노이는 1965년에 상원의원으로 당선됐고, 그해에 마르코스 를 부패 혐의로 기소했다. 군대 예산을 늘려 군국주의 국가를 설립 하려 한다는 혐의도 추가했다. 그리고 대통령과 그의 부인 이멜다 Imelda의 사치스러운 생활과 사기 행각을 용기 있게 비난했다.
니노이의 추종 세력은 점점 늘어났다. 니노이는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마르코스를 이길 유력한 후보가 됐다. 니노이의 대의명 분에는 힘이 있었다. 그는 민주주의, 자유, 도덕규범, 훌륭한 지도 력, 국민 통합, 풍요로운 필리핀을 꿈꿨다.
1971년 8월 21일, 자유당의 전당대회가 열렸다. 군중의 환호성 과 밴드의 신나는 연주가 뒤섞였다. 그런데 갑자기 폭탄 두 개가 터졌다. 폭탄 테러로 성명이 사망하고, 120명이 총상을 입었다. 열정 에 자유당 후보였던 니노이는 없었다. 그래서 마르코스는 나노이 가 어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려고 자작극을 벌인 거라고 주 장했다.
이 사건 때문에 그다음 해에 정치적 사회적 소요가 잇달아 일어 났다. 마르코스는 혼란이 가중된 틈을 타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고 했다. 1935년 제정된 헌법에 따르면, 마르코스가 대통령을 세 번 연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마르코스는 1972년 9월 21 일,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얼마 후 기존 헌법을 폐지하고, 자 신이 장기 집권할 토대를 마련했다.
계엄령에 따라 마르코스는 즉각 니노이를 체포해 사형을 선고했 다. 니노이는 재판을 기다리며 감옥에서 8년을 보냈다. 코리는 고 립된상태에서 다섯 명의 자녀를 홀로 키웠다.
감옥에 갇힌 지 거의 6년이 흘렀는데도 조국 민주주의를 향한 니 노이의 집념은 약해지지 않았다. 니노이는 목숨을 걸고 단식투쟁 을 벌이기도 했고, 1978년에는 수감된 상태에서 대통령 선거에 출 마했다.
1980년 3월 중순, 감옥에 있던 니노이는 심장마비를 일으켜 필 리핀 심장 센터로 이송됐다. 병원에서 그는 또다시 심장마비를 일 으켰다. 심전도 검사 결과 동맥이 막혀 있었지만, 필리핀 의사들은 관상동맥우회술을 하기를 꺼렸다. 니노이를 살려왔다고 마르코스 에게 보복당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중략———

주의 단제에서 위 여권을 받았다. 입국 심사를 아슬아슬하게 있 과하며 비행기를 여러 번 갈아탄 끝에, 니노이는 1983년 8월 21 일 필리핀에 착륙했다.
자신의 운명을 감지한 그는 방탄조끼를 입고 있었다. 나노이는  자신과 동행한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이 순식간에 일어날 겁니다. 그러니 카메라로 바로 촬영할 준비 를 해두십시오. 3~4분 만에 모든 게 끝날 수 있어요. (웃으면서) 그러 면 나는 여러분에게 다시는 말을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오열오열 ㅜㅜ…)
비행기가 마닐라 국제공항에 착륙한 후, 니노이는 활주로로 이 어진 계단으로 나오자마자 머리에 총을 맞고 숨졌다. 니노이를 암 살한 사건이 마르코스 정부에 대한 불신에 불을 지피며, 정권을 반 대하는 시위가 급증했다.
니노이가 사망한 후 10일이 지난 1983년 8월 31일, 그의 장례 미 사가 케손시티의 산타 메사 헤이츠에 있는 산토 도밍고 교회에서 거행됐다. 니노이의 어머니 오로라Aurore는 장례식장 측에 "정부가 내 아들에게 한 것"을 모두가 똑똑히 볼 수 있도록 아들의 시신을 그대로 두라고 말했다. 시민 200만 명 이상이 거리에 줄지어 서서 장례 행렬을 지켜봤다.
재판부는 코리의 남편을 암살한 사건에 가담한 피고 26명 모두 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암살 사건을 덮어버리는 필리핀 정부의 만행에 세상의 이목이 쏠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크리는 중대 결심을 했다. 역사가 윌 듀런트는 "상황이 요구한다면 보통 사람의 능력은 두 배로 증가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코리는 마르코스 정권을 무너뜨리고 필리핀의 민주주의를 회복 하는 데 온몸을 던지기로 결심했다. 스스로 전업주부라고 말한 코 리는 반마르코스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부상했다.
1986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신에 대한 반대 세력이 늘어나 는 것을 알게 된 마르코스는 갑자기 선거를 예정보다 일찍 치르겠 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코리가 대선에 출마해야 한다는 청원도 빠 르게 늘어났다. 청원에 서명한 수백만 명에 대한 답변으로 코리는
1985년 12월 3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선거 운동에 뛰어든 마르코스는 코리가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평범한 여성'이라고 주장하며 악랄하게 공격했다.
그러나 코리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미국을 포함한 세계지도자들이 코리를 지지했다.

하와이에서 3년간 빼돌린 자금을 가지고  (100억달러에 달하는 약대 최대 규모의 정부 절도로 기네스북 세계기록에 등재됐다)도피 생활을 한 마르코스는 72세 생일을 맞은 지 17일 만에 신장, 심장 및 에 진환으로 사망했다. 하와이에서 머무는 동안 마르코스와 이멜다는 호놀룰루의 마키 키 하이츠에 있는 호화 저택에 살았다. 필리핀에서는 자신들이 집 권하면서 쌓아놓은 나랏빛으로 국민이 고통받고 있는데도 마르코 스가족은 사치스러운 파티를 즐긴 것으로 알려졌다.
코리 아키노는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1986~1992년에, 1987년 헌법 개정을 감독해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하고, 상하 양원제 의회 를 부활시켜, 과거의 독재적인 정부 구조를 성공적으로 제거했다.
그리고 인기 없는 정책이긴 했지만, 외국의 신뢰를 회복하고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마르코스가 진 빚 상당액을 상환했다.
대통령 임기를 마친 후 코리는 조용히 시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 갔다. 2009년 8월 1일, 코리는 숨을 거두었고 그를 기리기 위한 기 념물들이 필리핀 전역에 지정됐다. 필리핀에서 '민주주의의 어머 니'였던 코리 아키노는 자신이 꿈꿨던 미래의 내가 됐다. 코리는 목적을 달성했다.

한 사람의 아내로 5명 자녀의 엄마로 생활하던 코리가 어떻게 나라의 수장이 되었을까 대단하다..두려웠을텐데.. 남편을 잃어 힘들었을텐데..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 일까..(한계 없는 인간의 의지를 못믿고 있는 나를 발견 .. 말로는 한계가 없다없다 했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미래가 있다. 10년 후 혹은 20년 후, 아니면 그 보다 더 먼 미래에 우리는 미래의 내가 돼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다
음 질문을 해봐야 한다.
미래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무슨 일에 전념할 것인가?

(나의 미래를 생각하니 왜 이렇게 불안할까??…계속 그러네…생각하기 싫어지고..현재의 삶이 너무 게으르고 보기싫어서가ㅜ아닐까?? 요롷게 살다보면 5년후 10년 후에도 똑같을까봐 두렵고.. 죽고 없을까봐 두렵네..)

코리의 경우처럼 미래의 당신도 예상과 상당히 다른 모습이 될 수 있다. 코리는 자신이 마르코스를 밀어내고 최초의 여성 대통령 이 될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변한다. 삶의 사건들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노화가 우리를 변화시킨다.
배움, 관계, 경험, 성공, 실패가 우리를 변화시킨다.
미래의 나에 대한 진실 7가지를 알게 되면, 당신은 살면서 경험 할 변화에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 자신과 다른 사 람들을 위해 혁신적인 변화를 선택하고 만들어낼 능력을 얻을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