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친구의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 다시읽게 된책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

야금맘 2024. 2. 5. 16:01

병원 생활을 하시는 엄마를 간호하다가 엄마를 보내드렸다는 친구를 만났다..
무남독녀 외동딸에 아버지도 오래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는  친구..
한동안 못만났다가 오랜만에 만났는데 불쑥 “엄마가 돌아가셨어..”라고 어색하지만 담담하게 얘기를 했다..
우리 엄마도 아프시다 돌아가셨어서..혼자 남은 친구의 마음이 너무 너무 안쓰러웠다..

몇 일전 2년전에 작업한 엄마이야기라는 영상을 다시 업로드한터라 더 많이 마음이 갔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영상이 갑자기 보였나??하는 생각을 해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qtWG50Z7aUg&pp=ygUZ7JW86riI66eYIOyXhOuniOydtOyVvOq4sA%3D%3D

다시 들으면서 엄마생각 엄마마음이 떠올라서 많이 울었다..

음..오늘 갑자기 스웨덴 불교 수행자인 비욘나티코 린데블라드의" 내가 틀릴수도 있습니다." 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280P 죽음을 앞둔 아버지와의 이별을 적은 챕터 "떠날 때를 아는 이별" 을 공유해본다.

비가 쏟아지던 2018년 9월 어느날 , 바르메리에 있는 병원에 갔을때 죽음이 제 어깨에 앙상한 손을 얹었습니다. 그날이 처음은 아니었지요. 실은 몇 달 전인 6월 초 어느 화창한 날 오후, 팔스테르보에 있는 부모님의 여름 별장에서도 죽음은 앙상한 손을 제 어깨에 댔습니다.부모님은 문을 열어줄때면 늘 저를 세상에서 가장 반가운 사람인 양 환영해주었습니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하지만 반갑게 포옹한 뒤에 보니 분위기가 평소 같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무겁게 입을 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비욘, 너한테 해줄 말이 있단다. 일단 자리에 앉자" 자리에 앉자 아버지는 평소처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습니다. "내가 COPD, 그러니까 만성폐색성폐질환을 앓고 있단다. 시간이 많지 않아 . 난 얼마 못 살거란다."

아버지는 무덤덤하게 할 말만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습니다. 제가 뭐라고 말해야 할 차례였지요, 그 순간 제안에선 순식간에 폭풍우가 휘몰아 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무 말이나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잠시 깊은 생각에 빠졌던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동안 멋지게 사셨죠" 어쨌거나 아버지는 여든네 번째 해를 보내고 있었습니다.아버지는 무릎을 철썩 치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래 ,너는 알아줄 줄 알았다.!" 아버지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말이다, 비욘. 나는 병원에서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고 싶지 않단다.질병이 마수를 뻗치기 전에 끝내고 싶고나."

아버지가 20년 동안 똑같은 얘기를 했기에 딱히 놀랍진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당신 인생이 더 살 가치가 없다고 느껴지면 그 생을 끝낼 권리가 있다고 늘 주장해 왔습니다. 승려 시적엔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행위를 부추길수 없다는 계율때문에 아버지의 입장을 지지할 수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지요,

병이 심각하게 진행될 때까지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습니다. 스웨덴에서는 안락사가 불법이므로 형제들과 저는 아버지의 뜻을 이뤄주려고 서둘러 절차를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는 결국 스위스의 어느 기관을 찾았고 , 그달말쯤 날짜를 받았습니다.아버지는 7월26일에 바젤 에서 의사의 조력으로 고통없이 죽음을 맞이하기로 했습니다. 막상 받아 들자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왜 그리도 빠르게 흐르던지요. 제게 2018년 여름은 가장 무덥고도 슬픈 계절로 남았습니다. 그 뜨겁고 서글픈 여름을 달래준 상담사의 이름은 스포티파이(음원 스프리밍 서비스)였습니다.
가족들은 바젤까지 스피커를 챙겨 가기로 했습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할 에베르트 타우베의 노래와 스코틀랜드의 백파이프 연주곡 등으로 재생목록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아직 세상이 잠든 시간에 몸을 일으켜 남몰래 슬픔에 잠겼습니다. 종종 컴퓨터 앞에 홀로 앉아 스위스로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의료 서류,여권사본, 은행업무 비행기와 호텔 예약 등을 확인하고 조율하다 지칠 때면 아버지를 위해 준비한 재생목록에서 노래를 한두 곡 들었습니다. 지금도 백파이프로 연주되는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들을 대면 목이 메어오고 맙니다.아버지가 그랬듯 말입니다.

마침내 그날이 왔습니다. 우리는 스위스의 한 호텔에 모였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세 형제와 나, 바젤은 스웨덴보다 훨씬 더웠습니다. 우리는 지난 한 달 반 동안 그랬듯 막판까지 두 가지 현실을 오갔습니다. 옛일을 회상하면서 짓궂은 농담을 던지고 한바탕 웃다가 눈앞에 닥친일을 실감하고 말을 잃은 채 고개를 돌렸습니다. 말로 할 수없는 이야기가 얼굴에 담겨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입을 열때마다 자꾸만 고맙다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서 택시에 몸을 싣고 바젤 외곽으로 향했습니다.중앙에 침대가 놓인 쾌적한 방에서 의사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이 아버지는 침대에 누워서 팔에 링거를 맞았습니다. 가족끼리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의사가 방을 나갔습니다.

우리는 준비해온 음악을 틀었습니다. 스벤 베르틸 타우베 (에베르트 타우베의 아들)의 목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지요, 지난 한 달 동안 얼마나 울었던지 . 더 나올 눈물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지요, 우리는 돌아가면서 흐느꼈습니다. 누가 기대어 울 어깨를 찾으면 돌아가면서 흐느꼈습니다. 누가 기대서 울 어깨를 찾으면 다른 누가 빌려주고 , 그들이 진정되면 다음 사람에게 똑같이 해 주었습니다. 곧 쓰레기통이 눈물 젖은 휴지로 넘쳐났습니다. 아버지만이 침착했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사후에 벌어지는 일을 놓고 늘 의견이 달랐지요.아버지는 육신의 삶이 끝나면 암흑만이 남는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안아주면서 귀에 대고 속삭였습니다."아버지, 혹시라도 이후에 무슨일이 벌어지거들랑 제가 '거 봐요 !'라고 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아버지는 껄껄 웃었습니다.

어머니는 노랑 장미꽃 다발을 아버지에게 주며 작별을 고했습니다. 노랑 장미는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었지요, 60년 동안 해로한 두 분은 딱히 무슨 말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서로 고맙다면서 바라보던 두 분의 모습을 저는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평생 사랑하고 존중하며 사는 부모님을 지켜본 것은 제게 비길데 없는 호사였습니다. 두 사람은 한 번도 서로를 당연하게 여긴 적이 없었습니다.

의사를 부를 시간이 됐을때 우리는 아버지의 침대에 둘러앉아 서로를 , 아버지를 꼭 붙들었습니다. 의사는 링거 스탠드 뒤에 섰고 아버지는 우리와 한 사람씩 차례로 눈을 맞추었습니다.

그런 다음 아버지는 스스로 주사제의 밸브를 열었습니다.

의사는 아버지가 떠나기까지 30초에서40초 정도 걸린다고 안내했습니다. 2분이 지났습니다. 그러자 어버지가 의사에게 고개를 돌렸습니다."이봐요 ,크리스티안 ,링거에 엉뚱한걸 넣진 않았겠죠?"

모두 웃음을 터트렸씁니다.
다음 순간 강렬한 뭔가가 아버지의 눈에 비쳤습니다.
몇 초 뒤 에베르트 타우베의 <린네아 >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아버지 몸에서 모든 근육이 일시에 작동을 멈췄습니다. 죽음은 즉각적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온화한 얼굴에서 뜻밖의 표정이 엿보였습니다. 순전한 경이로움이랄까요, 어린아이의 얼굴에서나 보일 것 같은 표정이었습니다. 마치 세상을 떠날 때 이런 일이 벌어질 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 같은 얼굴이었지요.

우리 모두의 삶이 멈춘 것과 같은 고요가 흘렀습니다.아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지요,
무슨 말인들 다 보잘것없게 느껴졌습니다 . 결국 누군가가 아버지의 눈을 감겨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흐트러진 눈썹을 쓰다듬어 주었지요, 우리 중 몇 명은 담요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를 토닥였습니다. 방안은 강렬한 노란색으로 빛났습니다. 장미꽃과 벽지 , 커튼, 저 하늘의 태양까지 전부.

얼마 뒤, 저만 남고 어머니와 형제들은 바젤로 돌아갔습니다. 우리 중 누군가는 남아 뒷일을 마무리해야 했고 , 스위스에서 마지막 2년 동안 승려로 지냈기에 제 독일어가 그나마 쓸만 했습니다.

아버지의 시신과 단둘이 남았을때 , 저는 촛불을 커고 세 번 절을 올린 다음 염불을 시작했습니다. 승려 시절 수 백 번의 장례를 치르며 고인의 혼을 달래고자 외웠던 것으로 제가 틀별히 사랑하는 불경이었습니다. 아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허락해준 일이었지요,그 순간 네 개 대륙에 흩어져 있는 아홉 곳의 불교 사원에서도 똑같은 염불이 아버지를 위해 울려 퍼졌습니다.